기무라 가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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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무라 가즈시는 일본의 축구 선수이자 지도자로, 1958년생이다. 메이지 대학 졸업 후 1981년 닛산 자동차(현 요코하마 F. 마리노스)에 입단하여 1994년 은퇴할 때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 윙어와 공격형 미드필더를 오가며 1983년, 1984년, 1989년 일본 올해의 축구 선수로 선정되었고, 3번의 리그 우승을 포함하여 다수의 클럽 및 개인 수상 경력을 보유했다. 1979년부터 1987년까지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54경기 26골을 기록했으며, 특히 프리킥 능력이 뛰어나 '마술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은퇴 후에는 지도자로 변신하여 2010년 요코하마 F. 마리노스 감독을 맡았으나 2011년 해임되었으며, 2012년부터는 축구 해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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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무라 가즈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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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클럽 경력 | |
유소년 클럽 | 1974-1976: 히로시마 공업 고등학교 1977-1980: 메이지 대학 |
프로 클럽 | 1981-1994: 닛산/요코하마 마리노스 |
클럽 출전 및 득점 | 출장: 233 득점: 51 |
국가대표 경력 | |
국가대표팀 | 일본 |
국가대표팀 연도 | 1979-1987 |
국가대표팀 출전 및 득점 | 출장: 54 득점: 26 |
감독 경력 | |
감독 연도 | 2001: 일본 풋살 2010-2011: 요코하마 F. 마리노스 |
수상 내역 (요코하마 F. 마리노스) | |
일본 사커 리그 | 우승: 1988/89, 1989/90 준우승: 1983, 1984, 1990/91, 1991/92 |
JSL컵 | 우승: 1988, 1989, 1990 준우승: 1983, 1985, 1986 |
천황배 | 우승: 1983, 1985, 1988, 1989, 1991, 1992 준우승: 1990 |
유튜브 정보 | |
채널 이름 | きむらかずしTV |
채널 URL | https://www.youtube.com/@k.kazushi10 |
활동 시작 | 2023년 3월 10일 |
장르 | 축구 |
구독자 수 | 1460명 (2023년 3월 22일 기준) |
2. 선수 경력
1981년 메이지 대학 선배인 가네다 노부토시가 있는 닛산 자동차 축구부(후의 요코하마 F. 마리노스)에 입부했다. 1979년, 메이지 대학 2학년 때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 대표팀의 단골 멤버가 되었다. 1983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예선 전까지는 오른쪽 윙으로 활약했지만, 소속 클럽과 마찬가지로 공격형 미드필더로서 공격의 핵이 되어 80년대 중반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었다. 1987년 서울 올림픽 예선 직전, 이시이 요시노부 감독이 수비적인 축구로 방침을 전환하면서 대표팀에서 제외되었다. 1986년, 당시 프로축구 선수 등록 제도 '스페셜 라이선스 플레이어'의 1호 선수가 되었다.
1993년, J리그 출범과 함께 요코하마 마리노스(현 요코하마 F. 마리노스)와 계약했다. '미스터 마리노스'로 불리며 이듬해인 1994년에 선수로서 은퇴했다. 은퇴 회견에서는 '좀 더 축구를 잘하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남기면서, 그러한 만족을 모르는 향상심이 기자와 팬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32]
2. 1. 유소년 경력
히로시마 다이가 FC[69]에서 현립 히로시마 공업고등학교(통칭: 현공)[70]로 진학하여, 공격적인 축구로 이름을 날린 현공의 중심 선수로 1975년 고교 선수권 대회에서 4강에 진출하였다.1977년 메이지 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하고 축구부에 소속되었으며, 동기로는 사사키 노리오가 있다.
2. 2. 프로 경력
히로시마 다이가 FC[69]에서 현립 히로시마 공업고등학교(통칭: 현공)[70]에 진학하여 공격적인 축구로 이름을 날린 현공의 중심 선수로 1975년 고교 선수권 대회에서 4강에 들었다. 1977년 메이지 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하고 축구부에 소속되었으며, 동기로는 사사키 노리오가 있다.기무라 가즈시는 1981년 닛산 자동차(후에 ''요코하마 마리노스'')에 입단하여 1994년 은퇴할 때까지 프로 선수로 활동했다. 닛산 자동차 시절(1981-1992)과 요코하마 마리노스 시절(1993-1994)로 나눌 수 있다. 1986년에는 프로 축구 선수 등록 제도인 '스페셜 라이선스 플레이어' 제1호 선수가 되었다.
2. 2. 1. 닛산 자동차 (1981-1992)
1981년, 기무라는 고등학교 선배 가네다 노부토시가 있는 닛산 자동차 축구부(후의 요코하마 F. 마리노스)에 입단했다.[10] 1982년부터 등번호 10번을 달았다.1986년, 당시 프로축구 선수 등록 제도 '스페셜 라이선스 플레이어'의 1호 선수가 되었다. 기무라는 "오쿠데라 씨가 프로인 상태로 일본 리그에 돌아오면, 나도 프로로 해달라."라고 스스로 요청했다. 연봉은 12억엔이었다. 국산 프로 제1호로서의 중책, 월드컵 예선 탈락의 충격 등으로 80년대 후반에는 성적이 부진했다.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도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를 미즈누마 다카시에게 빼앗기는 형식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후에 닛산이 일본 사커 리그, JSL 컵, 천황배의 삼관왕을 달성하며 다시 각광받긴 했지만, 이후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 다시 소집되지는 않았다. 첫 국산 프로 선수가 된 순간, 상대 선수들의 집요한 수비에 시달리게 되어 "이건 안 된다"라며 프로 계약 도중에 마음을 가졌고, 가정을 꾸리면서 축구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고뇌를 아내에게 털어놓기도 했다.
1983년과 1984년, 일본 올해의 축구 선수로 선정되었다. 소속팀은 1983년과 1985년에서 우승했다. 1988년부터 1990년까지, 2년 연속으로 일본 사커 리그, JSL컵 및 천황배에서 일본의 3대 주요 타이틀을 모두 획득했다. 1989년에도 다시 한번 일본 올해의 축구 선수로 선정되었다. 1990년대에 소속팀은 1990년 JSL컵, 1991년 및 1992년에서 우승했다. 아시아 무대에서는 1991-92년과 1992-93년에서 우승했다.
2. 2. 2. 요코하마 마리노스 (1993-1994)
1993년, J리그 출범과 함께 요코하마 마리노스(현 요코하마 F. 마리노스)와 계약했다. '미스터 마리노스'로 불리며[13][22] 활약했다. J리그 개막전인 베르디 가와사키와의 경기에서 선발 출장하여 짧은 코너킥으로 에바르통의 동점골을 어시스트하고[23], 디아스의 결승골의 기점이 되었다[24]. 6월 30일 우라와 레즈전에서는 절묘한 로빙슛으로 J리그 첫 골이자 J리그 유일의 골을 기록했다[25]. 7월 17일에는 J리그 올스타전에 7번을 달고 선발 출장하여[26] 스루패스로 미우라 가즈요시의 골을 어시스트했다[27]. 후기 개막전인 베르디전에서는 스루패스로 디아스의 골을 어시스트하여 3-0 승리에 기여, 당시 팽팽한 경기가 많았던 양 팀의 대결에서 기록적인 대승을 이끌었다[28]. 이 해, 부상으로 빠지는 경우도 많았지만, 특히 디아스와 좋은 호흡을 보이며[29] 시즌 내내 패스와 프리킥으로 많은 어시스트를 기록했다.1994년 11월 5일 산프레체 히로시마전에서 63분부터 출장하여[30] 리그 마지막 경기를 치렀다. 천황배 1회전 호쿠리쿠 전력전에서 득점(현역 마지막 골)을 올렸고, 준결승 세레소 오사카전에 선발 출장했으나(별다른 활약 없이 85분에 야마다 다카히로와 교체[31]), 1-2로 패배하며 현역 마지막 공식전을 마쳤다[11]. 같은 해 12월 27일, 번뜩이는 영감을 이유로 현역 은퇴를 발표했다[11]. 은퇴 회견에서는 은퇴라는 표현 대신 졸업이라는 말을 사용하며[11] "더욱 축구를 잘하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남겨, 그의 끊임없는 향상심은 기자와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32]. 1995년 7월 30일, 미츠자와 공원 구기장에서 라이벌 팀이었던 베르디 가와사키(현역 선수와 조지 요나시로 등 OB로 구성)와의 은퇴 경기가 개최되었다[33].
3. 국가대표 경력
기무라는 1979년 5월 31일 메이지 대학 재학 중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 인도네시아와의 경기에서 데뷔하였다.[1] 1985년에는 6경기 연속 골을 기록하며 일본 국가대표팀 연속 득점 기록을 세웠으며, 1986년까지 A매치 54경기에 출전하여 26골을 넣었다.[1]
1986년 월드컵 예선 한국과의 홈경기에서 40미터 거리에서 성공시킨 프리킥(축구) 골은 1980년대 일본 축구 최고의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히며, 현재까지도 축구 프로그램에서 프리킥을 다룰 때 자주 소개된다.[57][58][59]
3. 1. 주요 국제대회
기무라는 메이지 대학 재학 중이던 1979년 5월 31일, 인도네시아를 상대로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데뷔전을 치렀다.[1] 이후 1980년 하계 올림픽 예선, 1982년 월드컵 예선에 출전했다.1982년부터는 1982년 아시안 게임, 1986년 아시안 게임, 1984년 하계 올림픽 예선, 1986년 월드컵 예선 등 일본 국가대표팀의 주요 경기에 출전했다. 특히 1985년에는 6경기 연속 골을 기록하며 일본 국가대표팀 연속 득점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1] 1986년까지 일본 대표팀에서 54경기에 출전하여 26골을 기록했다.[1]
기무라의 주요 국제대회 출전 경력은 다음과 같다.
대회 | 연도 |
---|---|
모스크바 올림픽 예선 | |
1982 FIFA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예선 | |
아시안 게임 | 1982, 1986 |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예선 | |
1986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
4. 지도자 경력
은퇴 후 지도자가 되기 위해 1997년에 S급 라이선스를 취득했다. 2001년에는 일본 풋살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1] 부인과 함께 유한회사 슛을 설립하고(부인이 사장), 축구 해설가(주로 NHK BS1 'J리그' 해설)나 축구 교실 등을 운영했다.[1] 2007년에는 요코가와 무사시노 FC의 슈퍼바이저로 일했다.[1]
2010년 시즌부터 요코하마 FM 감독에 취임하며 자신의 첫 감독직에 도전했다.[1] 첫 시즌은 8위에 머물렀고, 2011년에는 시즌 중반까지 우승 경쟁을 했지만 가을에 들어서면서 부진하여 5위로 마쳤다.[1] 2011년 12월 29일에 천황배 준결승에서 패하여 이듬해 ACL 출장이 좌절되었고, 다음날인 12월 30일에 해임됐다.[1]
2011년 리그전 5위는 요코하마 FM이 마지막으로 우승한 2004년 이후 최고의 성적이었고, 상금권 내 진입은 2007년 이후 4년 만이었지만, 후반전에 경기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점을 개선하지 못하고, 결과에만 집중하여 수비적인 축구를 한 것이 '내용이 없다'는 평가를 받아 해임된 것으로 보인다.[1]
연도 | 팀 | 비고 |
---|---|---|
2001 | 일본 풋살 국가대표팀 | 감독 |
2010-2011 | 요코하마 F. 마리노스 | 감독 |
5. 플레이 스타일
- 1983년, 미즈누마 다카시의 닛산 자동차 입단을 계기로, 가모 슈 감독은 기무라 가즈시를 윙어에서 공격형 미드필더로 전향시켰다. 이후 기무라는 게임 메이커로서 중원을 장악하며 닛산 황금 시대를 이끌었다.[49][50] 라모스 루이와 함께 일본 축구 암흑기를 지탱한 선수 중 한 명으로, "닛산의 등번호 10번은 기무라 가즈시", "일본의 10번은 기무라 가즈시", "당시 대표팀은 기무라의 팀"이라고 불릴 정도였다.[51][52][53][54][55] 1983년과 1984년 일본 연간 최우수 선수상을 2년 연속 수상했고, 1989년에도 수상했다. 3회 수상은 가마모토 구니시게(7회)에 이어 스기야마 류이치와 함께 역대 2위 기록이다. 1984년에는 일본 사커 리그 최다 어시스트(12개)를 기록했다.
- 현역 시절 프리킥(축구) 명수로 알려졌다.[56] 자유자재로 컨트롤하는 프리킥은 당시 일본 선수들에게서 볼 수 없었던 기술이었다.[13] 정확한 볼 컨트롤과 날카로운 변화로 "마술사"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일본 리그와 국제 경기에서 수많은 명장면을 만들었다. 특히 1985년 1986 FIFA 월드컵 최종 예선 한국전에서 40미터 프리킥은 비록 경기에 패해 월드컵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1980년대 일본 축구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히며, 현재도 축구 프로그램에서 프리킥 특집에 빠지지 않고 소개된다.[57][58][59] 다카하시 요이치는 일본 대표팀 경기에서 "문득 떠오르는 것은 기무라 가즈시 선수의 직접 프리킥"이라고 말했다.[60]
- 텔레비전에서 펠레, 리벨리노, 지쿠가 프리킥으로 골을 넣는 것을 보고 대학교 때부터 연습했다.[61] 고등학교 시절 포워드(윙)였기 때문에 센터링(크로스)에 사용하던 인사이드 킥이 프리킥에 도움이 되었다. 당시 일본에는 프리킥으로 유명한 선수가 없었고, 1980년대 세계 축구에서는 예술적인 프리킥을 볼 수 있었지만 일본에서는 거의 화제가 되지 않았다.[56] 닛산 입단 후 본격적으로 연습을 시작, 특수 제작한 철골 구조물에 그물을 붙인 벽을 세워 연습했다. 신인 마쓰나가 나리타쓰를 연습 상대로 삼아 실력을 키웠고, 서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기무라는 "시게(마쓰나가)는 나랑 자주 연습했기 때문에 일본 대표팀에 들어갈 수 있었어"라고 농담하곤 했다.[57][62]
6. 에피소드
- 다이가 FC에서 현립 히로시마공업고등학교(통칭: 현공)[70]로 진학하여 공격적인 축구로 이름을 날린 현공의 중심 선수로 1975년 고교선수권대회에서 4강에 들었다.
- 1977년 메이지 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하고 축구부에 소속했으며 동기로는 사사키 노리오가 있다.
- 1979년 메이지 대학 2학년 때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 대표팀의 단골이 됐다.
- 1986년 당시 프로축구 선수 등록 제도 '스페셜 라이선스 플레이어'의 1호 선수가 된다. 연봉은 1200만엔이었다.
- 1993년 J리그 발족에 따라 요코하마 마리노스(현 요코하마 F. 마리노스)와 계약했다. '미스터 마리노스'로 불렸다.
- 1994년 선수로서 은퇴했다. 은퇴 회견에서 '좀 더 축구를 잘하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 은퇴 후 1997년에 S급 라이선스를 취득했다.
- 2001년 일본 풋살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 2007년 요코가와 무사시노 FC의 슈퍼바이저로 일했다.
- 2010년 시즌부터 요코하마 FM의 감독에 취임하며 자신의 첫 감독직에 도전했다.
- 2011년 12월 30일 (요코하마 FM) 감독직에서 해임됐다.
- 2012년부터 축구 해설가로 활동하며, NHK BS1 '프리미어리그'에서 '게스트 해설'로 일했고, 2014년에 정식으로 전속 해설에 복귀했다.
- 2015년 1월에 몸 상태의 불량을 호소하며, 뇌경색으로 병원에 실려간 사실이 3월에 밝혀졌다.
- 2015년 8월, NHK BS1 독일 분데스리가 개막 때 '도르트문트 x 묀헨글라트바흐'에서 해설을 했다.
- 기무라의 대명사는 프리킥이었는데, 프리킥을 차기 시작한 계기는 텔레비전에서 본 월드컵에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의 펠레와 히벨리누가 프리킥으로 직접 골을 넣는 장면을 본 것이었다.
- 메이지 대학에 재학 중이었던 기무라를 일본 대표에 처음 발탁한 감독은 당시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이었던 와타나베 마사시였지만, 기무라를 두고 ‘매우 컨트롤하기 어려운 선수’라고 했다.
- 기무라가 대표팀의 스타였던 1984년 여름, 사야마 이치로는 잡지 ‘Number’의 의뢰로 기무라에게 인터뷰를 신청했다.
- 메이지 대학 시절 동기생이었던 전 일본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 사사키 노리오와는 같은 기숙사에서 지낸 동료라서 지금도 친분이 깊다.
- 1986년 오쿠데라 야스히코와 함께 스페셜 라이선스 플레이어 제1호가 되었지만 서독에서 돌아오는 오쿠데라의 연봉 4000만엔에 비해 기무라의 연봉은 1200만엔이었다.
- 기무라의 부인은 축구 팬이 많지 않았던 1960년대 일본 사커 리그(JSL) 창설 때부터 축구를 좋아했다고 한다.
- "럭비는 신사가 하는 야만적인 스포츠, 축구는 야만인이 하는 신사적인 스포츠"라는 발언이 ‘Number’지 상에 남아있다.
- 과거 자신의 블로그 ‘기무라 가즈시의 조금 말해볼까’에서 “60년, 70년대는 가마 씨의 시대였지, 80년대는 나야."라고 언급.
- 해설자 시절의 코멘트에는, 적당히 넘겨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 마리노스 감독 시절에는 히로시마 사투리를 섞은 코멘트가 화제가 되었다.
7. 수상 내역
대회 | 횟수 | 연도 |
---|---|---|
일본 사커 리그 최우수 선수 | 1회 | 1989-90 |
일본 사커 리그 베스트 11 | 5회 | 1983년, 1984년, 1985-86년, 1988-89년, 1989-90년 |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 | 1회 | 2020년[4] |
일본 연간 최우수 선수상 | 3회 | 1983년, 1984년, 1989년 |
어시스트 왕 | 1회 | 1984년 |
JSL 동서 대항전 (올스타전) 최우수 선수상 | 2회 | 1982년, 1989년 |
- JSL 동서 대항전(올스타 축구) 7회 출전 (1982년, 1984년, 1986년, 1987년, 1989년, 1991년, 1992년), 4득점 (1982년, 1984년, 1989년, 1992년)
- 일본 사커 리그 우승 2회 (1988-1989, 1989-1990)
- JSL컵 우승 3회 (1988년, 1989년, 1990년)
- 천황배 우승 5회 (1983년, 1985년, 1988년, 1989년, 1991년)
- 아시안 컵 위너스 컵 우승 1회 (1991-1992)
7. 1. 클럽
기무라 가즈시는 1981년 닛산 자동차(후에 ''요코하마 마리노스'')에 입단하여 1994년 은퇴할 때까지 선수 생활을 하였다. 1982년부터 등번호 10번을 달았으며, 1983년과 1984년 일본 올해의 축구 선수로 선정되었다. 소속팀은 1983년과 1985년에서 우승하였다. 1988년부터 1990년까지는 2년 연속으로 일본 사커 리그, JSL컵, 천황배 3관왕을 달성하였고, 1989년에도 일본 올해의 축구 선수로 선정되었다. 1990년대에는 1990년 JSL컵, 1991년, 1992년에서 우승하였다. 아시아 무대에서는 1991-92년과 1992-93년에서 우승하며 구단 역사상 황금기의 핵심 선수로 활약하였다.리그 통산 251경기에 출전하여 51골을 기록하였으며, 일본 올해의 축구 선수에 3번, 베스트 일레븐에 5번 선정되었다.
'''수상 기록'''
대회 | 횟수 | 연도 |
---|---|---|
일본 사커 리그 | 2회 | 1988-89, 1989-90 |
JSL컵 | 3회 | 1988, 1989, 1990 |
천황배 | 5회 | 1983, 1985, 1988, 1989, 1991 |
아시안 컵 위너스 컵 | 2회 | 1991–92, 1992-93 |
일본 연간 최우수 선수상 | 3회 | 1983년, 1984년, 1989년 |
어시스트 왕 | 1회 | 1984년 |
JSL 동서 대항전 (올스타전) 최우수 선수상 | 2회 | 1982년, 1989년 |
- 일본 리그 1부 통산 202경기 44득점
- J리그 통산 31경기 1득점[34][11][35][36][37][38][39][40][41][42][43][44][45][46][47][48]
7. 2. 개인
기무라는 현역 시절 프리킥(축구)의 명수로 알려졌다.[56] 자유자재로 볼을 컨트롤할 수 있는 프리킥은, 당시 일본 선수들이 보여준 적이 없는 것이었다.[13] 그 정확한 볼 컨트롤과 날카로운 변화로 "마술사"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일본 리그, 국제 경기에서 수많은 명장면을 만들어냈다. 특히 1985년(쇼와 60년), 월드컵 멕시코 대회 최종 예선의 홈 한국전에서, 경기에 패해 월드컵에 출전하지는 못했지만, 40미터 앞에서 보여준 프리킥은, 80년대 일본 축구에서 손꼽히는 명장면으로 전설이 되었고, 현재도 축구 프로그램에서 프리킥이 특집으로 다루어질 때마다, 반드시 소개되고 있다.[57][58][59] 다카하시 요이치는, 일본 대표팀 경기를 보면서 "문득 떠오르는 것은, 그 기무라 가즈시 선수의 직접 프리킥"이라고 말했다.[60]프리킥을 차기 시작한 계기는, 텔레비전에서 브라질의 펠레와 리벨리노, 지쿠가 FK로 직접 골을 넣는 것을 보고, 대학교 재학 시절, 놀이 삼아 연습에 매진했다.[61] 발등은 너무 많이 차서 변형되었다고 한다. 원래 고등학교 시절에는 포워드(윙)였기 때문에, 센터링(크로스)은 인사이드(발등 안쪽) 부분을 많이 사용했고, 그것이 FK에 도움이 되었다. 당시 일본에는 아직, FK를 직접 결정하는 것으로 유명한 선수는 없었다. 1980년대 당시, 예술적인 프리킥은 세계 축구에서는 볼 수 있었지만, 일본 축구에서는 프리킥이 화제가 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56] 본격적으로 연습을 시작한 것은 닛산에 입단하고 나서이며, 팀이 특주 제작해 준 철골을 조합한 것에 그물을 붙인 간단한 벽을 세워 연습했다. 연습 상대로 선택한 것이 신인이었던 마쓰나가 나리타쓰. 처음에는 서툴러서 어디로 차도 들어갔지만, 연습하는 동안 점차 마쓰나가가 능숙해지고, 둘 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상호 상승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농담으로 "시게(마쓰나가)는 나랑 자주 연습했기 때문에 일본 대표팀에 들어갈 수 있었어"라고 자주 말했다.[57][62]
1984년(쇼와 59년) 여름, 사야마 이치로는 잡지 『넘버』의 의뢰로 기무라에게 인터뷰를 신청했다. 닛산 홍보 담당자는 축구 전문지 이외에서 취재가 온 것은 처음이라며 놀랐다. 당시 축구는 『넘버』에서도 같은 해 9월 20일호의 가마모토 구니시게 은퇴 기념호에서 처음으로 축구 특집이 성립될 정도로 마이너한 상황이었다. "괜찮으시겠어요, 익숙하지 않아서 말을 안 할지도 몰라요"라고 말하고 인터뷰를 했더니, 실제로 기무라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대답 후에 의미불명의 웃음을 터뜨리는 것에 경탄했다. 그러나 만날 때마다 말을 더 잘하게 되었다고 한다.[63]
고등학교와 대학교, 닛산 입단 초기에는 윙어(포워드)로 활약했지만, 1983년(쇼와 58년) 미즈누마 다카시의 입단을 계기로, 가모 슈 감독에 의해 공격형 미드필더로 전향했다. 이후, 게임 메이커로서 중원을 장악하며 닛산 황금 시대를 구축하는 원동력이 되었다.[49][50] 라모스 루이 등과 함께 일본 축구 암흑기를 지탱한 선수 중 한 명이며, "닛산의 등번호 10번 하면 기무라 가즈시"라고 불렸고, 80년대 중반에는 "일본의 10번 하면 기무라 가즈시"라고 불릴 정도였다.[51][52][53][54][55] 1983년(쇼와 58년), 1984년(쇼와 59년), 2년 연속 일본 연간 최우수 선수상(풋볼러 오브 더 이어)을 수상했고, 1989년에도 동상을 수상했다. 3번의 수상은 가마모토 구니시게의 7번에 이어 스기야마 류이치와 함께 역대 2위이다. 1984년 어시스트(스포츠)왕을 차지했고, 어시스트 수 12개는 JSL 기록이다.
1979년(쇼와 54년), 메이지 대학 2학년 때 일본 대표팀에 발탁되어, 5월 27일 피오렌티나와의 친선 경기에서 선발 출전하여 첫 출전을 하였다.[34] 이후 대표팀의 주전 선수로 자리 잡았다. 1982년 1월 20일 제록스 슈퍼 사커에서 디에고 마라도나를 보유한 보카 주니어스와의 경기에서 직접 프리킥으로 골을 기록했다.[11][35] 1983년(쇼와 58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예선 전까지는 오른쪽 윙 스페셜리스트로 활약했지만, 소속 클럽과 마찬가지로 공격형 미드필더로 변신하여 80년대 중반의 일본 대표팀을 이끌었다. 1984년, 대한민국에서 개최된 제12회 한일 정기전에서 직접 프리킥으로 득점을 올려, 원정에서 첫 한일전 승리에 기여했다.[36]
1985년 2월 23일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 1차 예선 싱가포르와의 경기에서 1골을 기록했다(코너킥에서 직접 골을 넣었다).[37] 4월 30일 평양에서 열린 북한과의 경기에서는, 상대 선수와의 경합 중 뇌진탕을 일으켜 약 40분간 의식을 잃었고, 구급차로 병원에 실려 입원했다.[38] 5월 18일 싱가포르와의 경기부터, 10월 26일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 제1차전 대한민국과의 경기까지, 1985년 한 해 동안 A매치 6경기 연속 골을 기록했다. 이는 일본 대표팀 연속 득점 기록이다(2011년 기준).[39][40] 1987년(쇼와 62년) 서울 올림픽 예선 전에, 경기력이 부진했기 때문에 이시이 요시노부 감독은 기무라를 제외하는 결정을 내렸다.[41]
1989년, 5년 만에 일본 리그 연간 최우수 선수상을 다시 받았지만, 대표팀에는 소집되지 않았다. 1993년 도하에서 개최된 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 때, 한스 오프트 감독은 라모스 루이의 대체 선수로 기무라의 소집을 검토했지만, 실제로 선발되지는 않았다. 라모스 루이는 월드컵 출전권을 얻더라도 대표팀 은퇴를 생각하고 있었고, 출전권을 얻으면 오프트가 자신 대신 월드컵 본선 멤버로 기무라를 소집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출전권을 얻지 못하게 되자 사과했다고 한다.[42]
은퇴 후 지도자를 목표로 1997년 S급 라이선스를 취득했다. 2001년 풋살 일본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부인과 함께 유한회사 슛을 설립하고(부인이 사장), 축구 해설(주로 NHK BS1의 J리그 해설) 및 축구 스쿨 등을 운영했다. 2007년 요코가와 무사시노 FC의 슈퍼바이저를 맡았다.
2010년 시즌부터 요코하마 F. 마리노스의 감독으로 취임했다.[43] 첫 감독직 도전이었다. 1년차에는 8위에 머물렀고, 2년차인 2011년 시즌 중반까지 우승 경쟁을 했지만, 가을에 들어서면서 부진하여 5위로 마쳤다. 12월 29일 천황배 준결승에서 패배하여 다음 해 ACL 출전이 무산되었고, 다음 날 해임되었다.
2011년 리그 5위라는 성적은 요코하마 F. 마리노스가 마지막으로 우승한 2004년 이후 최고 성적이었고, 상금권 진입은 2007년 이후 4년 만이었지만, 후반전의 부진을 만회하지 못했고, 결과에 집착하기 위해 수비적인 축구를 한 것이 "내용이 없다"고 판단되어 해임되었다.[44][45] 이후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었다고 한다.[46]
2012년부터 축구 해설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NHK BS1의 프리미어 리그에서 "게스트 해설"로 활동했으며, 2014년부터 정식 전속 해설로 복귀했다.
2015년 1월에 컨디션 불량을 호소하여 뇌경색으로 병원으로 이송된 사실이 3월에 공표되었다.[47] 8월, NHK BS1 독일 분데스리가 개막전 "도르트문트 vs 묀헨글라트바흐" 해설을 통해 복귀했다.
2020년 9월 10일, 일본 축구계에 대한 공적이 평가되어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것이 발표되었다.[48]
8. 개인 기록
1977년 메이지 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하여 축구부에 소속되었으며, 동기로는 사사키 노리오가 있다. 1979년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 주전 선수로 활약하였다. 1983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예선 전까지는 오른쪽 윙으로 활약했지만, 소속 클럽과 마찬가지로 공격형 미드필더로서 공격의 핵이 되어 80년대 중반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었다. 1987년 서울 올림픽 예선 직전, 이시이 요시노부 감독이 수비적인 축구로 방침을 전환하면서 대표팀에서 제외되었다.
기무라 가즈시는 다음 대회에 참가하였다.
- 모스크바 올림픽 예선
- 1982 FIFA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예선
- 아시안 게임(1982, 1986)
-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예선
- 1986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8. 1. 클럽 기록
클럽 성적 | 리그 | 컵 | 리그컵 | 합계 | ||||||
---|---|---|---|---|---|---|---|---|---|---|
시즌 | 클럽 | 리그 | 출장 | 득점 | 출장 | 득점 | 출장 | 득점 | 출장 | 득점 |
일본 | 리그 | 천황배 | J리그컵 | 합계 | ||||||
1981 | 닛산 자동차 | JSL 디비전 2 | 18 | 6 | 2 | 0 | 2 | 2 | 22 | 8 |
1982 | JSL 디비전 1 | 18 | 0 | 2 | 2 | 0 | 0 | 20 | 2 | |
1983 | 18 | 5 | 5 | 2 | 4 | 6 | 27 | 13 | ||
1984 | 17 | 8 | 4 | 2 | 0 | 0 | 21 | 10 | ||
1985/86 | 21 | 6 | 4 | 3 | 4 | 3 | 29 | 12 | ||
1986/87 | 20 | 2 | 4 | 1 | 5 | 1 | 29 | 4 | ||
1987/88 | 14 | 1 | 3 | 1 | 1 | 0 | 18 | 2 | ||
1988/89 | 22 | 8 | 5 | 1 | 5 | 4 | 32 | 13 | ||
1989/90 | 22 | 8 | 5 | 0 | 4 | 1 | 31 | 5 | ||
1990/91 | 10 | 3 | 4 | 2 | 4 | 2 | 18 | 7 | ||
1991/92 | 22 | 3 | 5 | 1 | 3 | 1 | 30 | 5 | ||
1992 | 요코하마 마리노스 | J1리그 | - | 4 | 3 | 9 | 0 | 13 | 3 | |
1993 | 21 | 1 | 0 | 0 | 2 | 0 | 23 | 1 | ||
1994 | 10 | 0 | 4 | 1 | 3 | 0 | 17 | 1 | ||
합계 | 251 | 51 | 51 | 22 | 46 | 20 | 348 | 93 |
1986년, 기무라 가즈시는 당시 프로축구 선수 등록 제도였던 '스페셜 라이선스 플레이어' 1호 선수가 되었다. 그는 "오쿠데라 씨가 프로인 상태로 일본 리그에 돌아오면, 나도 프로로 해달라."라고 스스로 나섰으며, 연봉은 120억엔이었다.[2] 국산 프로 1호 선수로서, 월드컵 예선 탈락의 충격 등으로 1980년대 후반에는 성적이 부진했다. 이후 닛산이 일본 사커 리그, JSL 컵, 천황배 3관왕을 달성하며 다시 주목받았지만,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는 다시 소집되지 않았다. 그는 프로 계약 도중 "이건 안 된다"라며 심경의 변화를 가졌고, 가정을 꾸리면서 축구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고뇌를 아내에게 털어놓기도 했다.
1993년, J리그 출범에 따라 요코하마 마리노스(현 요코하마 F. 마리노스)와 계약했다. '미스터 마리노스'로 불렸으며, 이듬해인 1994년에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은퇴 회견에서 '좀 더 축구를 잘하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남겨, 그의 만족을 모르는 향상심이 기자와 팬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8. 2. 국가대표팀 득점 기록
순번 | 날짜 | 장소 | 상대팀 | 득점 | 결과 | 대회 |
---|---|---|---|---|---|---|
1 | 1980년 12월 28일 | 코즈웨이베이, 홍콩 | 1–0 | 3–0 | 1982년 FIFA 월드컵 예선 | |
2 | 1982년 11월 21일 | 뉴델리, 인도 | 1–0 | 1–0 | 1982년 아시안 게임 | |
3 | 1983년 9월 4일 | 도쿄, 일본 | rowspan=2| | 2–0 | 7–0 | 1984년 하계 올림픽 예선 |
4 | 6–0 | |||||
5 | 1983년 9월 7일 | rowspan=5| | 3–0 | 10–1 | ||
6 | 5–1 | |||||
7 | 8–1 | |||||
8 | 9–1 | |||||
9 | 10–1 | |||||
10 | 1983년 9월 15일 | 2–0 | 2–0 | |||
11 | 1984년 4월 15일 | 칼랑, 싱가포르 | 2–5 | 2–5 | ||
12 | 1985년 2월 23일 | 칼랑, 싱가포르 | 1–0 | 3–1 | 1986년 FIFA 월드컵 예선 | |
13 | 1985년 5월 18일 | 도쿄, 일본 | 5–0 | 5–0 | ||
14 | 1985년 5월 26일 | 1–? | 1–4 | 친선 경기 | ||
15 | 1985년 6월 4일 | 나고야, 일본 | 3–0 | 3–0 | ||
16 | 1985년 8월 11일 | 고베, 일본 | 1–0 | 3–0 | 1986년 FIFA 월드컵 예선 | |
17 | 1985년 9월 22일 | 코즈웨이베이, 홍콩 | 1–0 | 2–1 | ||
18 | 1985년 10월 26일 | 도쿄, 일본 | 1–2 | 1–2 | ||
19 | 1986년 9월 20일 | 대전, 대한민국 | rowspan=2| | 3–0 | 5–0 | 1986년 아시안 게임 |
20 | 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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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학년 위에는 소와 히로시, 한 학년 위에는 가네다 노부토시, 이시자키 노부히로, 한 학년 밑에는 사루사와 시게루, 오키무네 도시히코, 오키노 다카유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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